놀란 얼굴의 예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둘이 썸 타는 사이였어?” 남자 직원들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민주는 양손을 크게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엣. 썸이라뇨. 셰프 일하는 모습이 멋지다고는 생각하지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민주를 보며 만호는 아무 말 없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만호를 빤히 쳐다보던 예지가 “어라,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넌 어때?”라고 물었다. 만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먼저 민주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민주 씨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맞다. 더 친해지면 말해준다고, 비밀이라고 했잖아” 민주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주와 만호의 어색한 침묵이 길어지며 달아올랐던..
“먼저 가서 준비해 놓고 있을게요” 만호가 매장을 나서며 유영빈 점장에게 인사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었다. “그래요. 7시까지 우리 모두 도착할 것 같네. 기대할게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웃는 영빈에게 만호가 수줍은 듯 “그냥 평범한 고깃집인데요”라고 대답했다. “셰프! 특제 제육볶음 많이 만들어 놓아요”라며 민주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카페 토라세 방배점의 오늘 회식은 근처 식당이 아닌 만호 부모님이 하는 고깃집에서 하기로 했다. 고기도 고기지만, 만호가 만드는 제육볶음을 모두가 꼭 한번 먹어 봐야 한다는 민주의 아이디어였다. 거리 두기 해제의 영향인지 지난달 운영한 벚꽃 팝업 매장은 성황을 이뤘다. 목표 대비 2배 이상 매출로 포상금이 내려온 게 1주일 전이었다. 매장 직원들은 좋아하면서도 미안한..
오히려 당황한 것은 서한준이었다. 유리는 여전히 한준을 바라보며 질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 보이기는요. 요즘은 한 과장님하고 점장님하고 사이가 좋아 보여서, 그냥” 방금 전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잃고 소심하게 말꼬리를 흐리는 한준을 대신해 영빈이 지금의 어색함을 수습하려는 듯 끼어들었다. “맞아요. 우리가 어때 보이긴. 좋게 지내는 걸로 보이죠 뭐. 이제 그만하고 다른 재밌는 얘기해요” 그의 말에 유리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강한나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부릅 뜨고는 손가락을 세워 삿대질하듯 영빈 쪽을 가리켰다. “아, 진짜. 남자가 대체 왜 그래요!” 영빈은 지난 회식에서 처음 봤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났다. 한나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정만호가 피자를 들고 호수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유영빈 점장이 사가지고 온 치킨 두 마리는 벌써 사라져 버렸기에 일행들은 그의 손에 들린 피자 박스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 카페 토라세 방배점 직원들이 앉은 한편에는 빈 맥주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마침 근처 마트에서 와인을 사가지고 돌아오던 서한준이 막 자리에 앉은 만호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딱 맞춰 왔네요. 술도 떨어지고 안주도 없어서 그랬는데” “점장님이 오라고 하셔서 왔는데, 제가 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에요. 오늘 만호 씨가 만든 샌드위치가 얼마나 인기 많았는데” 민망한 표정의 만호를 보고 강한나 매니저가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을 건네며 괜찮다는 듯 싱긋 웃었다. 가로등..
만호는 퇴근 준비하고 있는 민주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일부터 열흘 동안 이곳에서 민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진 자신과는 달리, 조그만 노래를 흥얼대는 민주의 모습에 서운하기도 했다. “민주 씨, 꽤 힘들 텐데. 걱정이네요” “에이, 아니에요. 저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분들하고 같이 가는걸요” “내가 샌드위치 만들어 가져갈 때 조금씩 도울게요” 민주는 조리실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매일 여기에서 일하다가 밖으로 나간다니까 설레네요. 소풍 가기 전날 잠 못 자던 어릴 때 같기도 하고, 히히” 벚꽃잎이 눈발처럼 고이 날리는 곳에서 민주와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풍경을, 민주가 조리실에서 나간 후에도 오랫동안 만호는 상상해 봤다. 호수 공원에서의 집합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
예쁘긴 하네요. 강한나 매니저가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커다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 그루의 나무들 중 몇몇은 성미 급하게도 하얀 벚꽃잎을 벌써 가지 위에 피워냈다. 원형 극장 형태로 계단 좌석이 늘어선 곳 중앙의 광장에서 한나와 유영빈 점장이 가설 매장을 세우는 현장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이제 일주일 뒤면 엄청 멋있어질 거예요. 워낙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니까” 영빈이 ‘봄바람 휘날리며~’라고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하자 한나는 ‘완전 아저씨네’라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째려 보고는 누가 볼까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스 음료의 매출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하면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봄이 왔음을 체감한다. 또 한 가지 변화는 테이크 아웃 주문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음료를 들고 밖으로 나가 따스해진..
한백인 상무는 일주일 뒤 회사를 떠났다. 약속받았다던 잔여 임기 1년의 반도 채우지 않았을 때였다.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별다른 환송식도, 마케팅 부문 구성원과의 인사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임원실의 짐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며칠 뒤 박윤수 팀장을 통해 들은 말로는 한백인 상무가 퇴임을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전이라고 했다.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나, 한 번 다시 봐야 할 이들과는 꾸준히 자리를 만들어 왔다고 했다. 지난 영빈과의 골프 라운딩도 그중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그 이야기를 해주는 박윤수 팀장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내가 윤수한테 빚진 게 많아” 지난 주말, 한백인 상무는 차창 너머로 점점 더 짙게 물들어가는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들었겠지만, ..
후반부의 주인공은 유영빈이었다. 10번 홀부터 영빈의 스코어가 갑자기 좋아졌다. 파 세이브 세 번, 보기 네 번으로 함께 나온 넷 중에 가장 잘 쳤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냐. 아까 막걸리에 약이라도 탄 거냐”라는 동기들의 농담에 영빈은 웃으며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골프공을 다시 한번 손에 쥐었다. 4년 전, ‘백인대장’ 한백인 상무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라운딩에서 그가 준 공이었다. 방금 한백인의 말대로 영빈은 고개를 들어 골프장 풍경을 눈에 담으려 해봤다. 매일 보던 회색 건물 대신 초록색과 노란색, 빨간색이 곳곳에서 이슬을 머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늘 기운 빠진 듯 한숨만 쉬고 다니던 박윤수 팀장이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빙긋 웃고 있었다. 동반자로 같이 온, 별로 가깝게 이야기 한 적 없던 고객분..
그가 티샷 하는 모습은 마치 동네 앞으로 마실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드라이버를 두어 번 정도 가볍게 흔들며 티 박스를 걸어가다가 바로 공을 때려버렸다. 영빈은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하얀 공을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세 번 크게 빈 스윙을 한 후 때린 자신의 공은 오른쪽으로 사라져 OB가 된 직후였기에 지금의 장면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상무님이 절 초대하셨다고요?” LJ 그룹 카페 마케팅팀 유영빈 대리의 깜짝 놀란 표정을 보고 같은 팀의 박윤수 팀장은 씩 웃었다. “영빈이 너, 골프 연습 시작한 지 세 달 정도 됐지? 이제 머리 올릴 때도 됐어. 첫 라운딩은 어른들하고 가서 매너도 배우고 자세 교정도 받고 그러는 거야. 게다가 윗분이 다 내줘서 공짜니까 더 좋지” 2주 뒤 토요일이라고, 그동..
영빈이 친 공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며 날아갔다. 슬라이스 궤적을 그린 공은 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언덕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조영욱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영빈이 스윙이 너무 뻣뻣한데? 예전에 너 일하던 스타일이랑 똑같다, 야” 어제 연습장이라도 들렀다 올 걸 그랬나. 호진은 오랜만에 잡은 골프 클럽이 아직 손에 익지 않은 듯 어색했다. LJ 그룹 동기 넷과 함께 나온 라운딩이었다. 친한 동기인 정지호와 함께 바깥바람 쐬는 건 좋았으나 동반자 중 한 명의 이름이 영 개운치 않았다. “조영욱도 온다고? 걔 있으면 싫은데”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애들 안된다고 해서 겨우 그 녀석까지 해서 네 명 맞춘 거야” 볼멘 목소리의 영빈에게 정지호가 타이르듯 말했다. “회사 회원권 어렵게 얻어서 싸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