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왜 나를 그냥 떠나가게 했나요] 옥수 터널을 지나 버스는 장충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호는 여전히 수진과 닮은 여자 승객을 신경 쓰며 운전했다.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그녀가 내리지는 않는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훔쳐봤다. 방금 옥수동 인근을 지날 때 여자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영호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당이 있는 동네, 수진을 만난 장소였다. 우리 둘의 일을 기억하고 있던 건가. 정말 수진이 맞는 걸까. 손영호 바오로 신부가 안수진이란 여자를 마음에 들여놓게 된 건 그로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못내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감정을 확인한 순간, 그의 삶과 수진의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
[애타게 기다리지 말아요. 사랑은 끝났으니까] 루카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음악회를 보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왔다. 190 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정돈되지 않은 채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와 파란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유럽 남자였다. 남성적인 인상과는 달리 운동에는 취미가 없고 수줍음이 많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레코드를 모으는 게 가장 즐거운 취미인 그는 신년 음악회를 직접 보는 게 평생의 꿈이었고, 마침 소망을 이룬 순간 수진이 옆에 있었다. 절반 정도는 모르는 곡이었지만 분위기를 충분히 즐겼던 수진과 달리 루카스는 지금껏 수천 번 넘게 들어 멜로디를 외우고 있는 모든 레파토리를 머릿속으로 따라 흥얼거릴 수 있었다. 라데츠키 행진곡의 마지막 앙코르 연주까지 끝..
[날 사랑하지 말아요 너무 늦은 얘기잖아요] 한국 겨울이 이렇게나 추웠나. 수진은 매서운 바람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홍콩에서 들어온 지 2주 째가 되었지만 외출할 때마다 옷을 더 두껍게 입고 나올 걸 하고 매번 후회했다. 오늘은 항공 승무원으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코엑스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홍콩에서 지낼 때 셋이 자주 어울렸었는데 두 명은 코로나 여파로 인한 회사 긴축 경영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항공 업계가 위축되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국내 항공사로의 이직은 어려웠다고 했다.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했던 사람은 학원 강사로 일하고, 다른 한 명은 결혼하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수진이 캐세이퍼시픽 항공에 승무원으로 취업해서 홍콩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의미를 잃어버린 그 표정] 버스는 압구정동을 지나 동호대교를 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물고기 떼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것처럼 반짝이는 햇살이 한강 수면 위에 비쳐 부서지고 있었다. 그 해 가을, 영훈이 성당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들과 강촌으로 수련회를 갔던 날에도 같은 풍경을 봤다. 열차에서 내린 그의 앞에 펼쳐진 북한강이 지금처럼 햇빛을 한껏 비추며 눈을 간지럽혔다. 신학생 시절, 대학 생활을 하는 친구들에게 대성리며 강촌에 MT를 다녀온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영호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한 데 모여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른 아침, 짝사랑하던 여자 선배와 단둘이 보트를 타면서 사귀게 되었다는 자랑 섞인 고백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젯밤 영호는..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날 위해 슬퍼 말아요] 질퍽했던 도로가 하루 만에 깨끗해졌다. 한낮의 햇살에 쌓여있던 눈이 말끔히 녹아내렸다. 어제 종일 긴장한 채 운행한 탓인지 목덜미가 뻐근했는데 다행이다 싶어 영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휴게실에서 동료 기사들과 노선에 공사 구간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눈 후 일어나 화장실에 들렀다가 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오후 운행으로 왕복 두 번을 다녀오는 일정이다. 영호가 운전하는 301번은 송파구 남쪽 구석에서 시작해 종로구 혜화동에서 끝나는 긴 노선이고 서울 도심을 관통하기 때문에 운행 시간이 제법 걸린다. 중간에 화장실 갈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식사는 물론 마시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방금 휴게실에서도 커피를 마시지 ..
출근길에 스마트폰을 길바닥에 떨어뜨렸다. 내 잘못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걷던 중에 폰을 들고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하느라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해 부딪히고 말았다. 씨발. 그 남자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닥에 나뒹군 전화기를 주울 생각도 못 하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쭈그려 앉아 폰을 집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화면 보호 필름에 오른쪽 위부터 두껍게 금이 그어진 것뿐 전화기는 다행히 멀쩡했다. 그제야 안심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방금 들은 욕지거리가 귀에 맴돌며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다 팀장 새끼 때문이야. 2주 동안 밤 10시 전에 퇴근한 날이 없었다. 주말엔 회사에 나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마음 놓고 ..
“이렇게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있으니, 이제 아가씨도 이웃이네요.” 현자가 희미하게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말했다. 경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웃이요? 여기 살지도 않는데 무슨 이웃이에요. 저는요, 일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니, 일도 아니지. 그냥 알바생이예요. 돈 받고 아이 봐주는 사람일 뿐인걸요. 그것도 세 달짜리 단기 알바.” 경미의 가시 돋친 말투에 진욱은 현자 옆자리에 앉아 큼지막한 족발 뼈를 야무지게 뜯어먹고 있는 주호를 바라봤다. 아이는 뼈 사이의 살을 발라 내는데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랬군요. 전 이모나 고모인 줄 알았는데.” 현자가 민망한 얼굴로 사과하듯 말했다. 그때 주호가 뼈에서 입을 떼고는 말했다. “난 이모나 고모 없어. 할머니도 없고 엄마도 없어. 아빠만 있어...
전화를 끊고 나서 경미는 쾌재를 불렀다. 두 주먹을 쥔 채 헛, 하고 짧게 기합 소리를 내자 주호가 “누나 뭐해?”라고 물었다. 딱히 다른 일은 없었지만 밤늦게까지 아이를 봐주기 어려운 듯 연기했더니 형욱이 먼저 추가 수당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도 하루치 일당의 두 배나 되는 금액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오늘 아빠는 늦으실 거고 누나가 같이 있을 거라고 하니 주호는 서운한 표정과 좋아하는 얼굴을 번갈아 내비쳤다. 얼른 오늘 할 거 마치고 놀자는 말에 주호가 거실 바닥에 엎드려 수학 학습지를 풀었다. 경미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그 모습을 보다가 어느 틈에 졸기 시작했다. 눈을 뜨니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어느 틈에 주호가 소파로 올라와 경미 옆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살며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 하는 현자의 팔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문 앞까지만 부축하려 했던 진욱은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실례지만, 같이 모시고 들어갈게요”라고 말했다. 현자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1101호는 진욱의 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두 배는 넓어 보일 정도였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거실은 휑했다. 티브이도, 소파도 보이지 않았고 현관 맞은편 벽 앞에 일인용 안락의자와 작은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책이 서너 권 있는 것으로 보아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소파가 있으면 그 위에 그녀를 누일 생각이었던 진욱은 난감한 표정으로 부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싱크대 맞은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커다란 원형 식탁이..
아끼꼬가 독신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를 만나 사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만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명절이 되어 이모네 가족들이 한데 모이면 성인이 되어 분가해 사는 사촌 형제들은 이미 혼기가 훌쩍 지난 아끼꼬를 걱정해 주었고 중매를 주선하기도 했다. 여전히 단란한 그들 식구의 모습이 좋았고 자신이 거기 속해 있음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아끼꼬는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런 가족을 만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엄마가 된다는 건 그녀에게 결코 손에 쥘 수는 없는, 저만치에서 흐릿하게 부유하고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 경제가 호황을 맞으며 사무 보조로 일하고 있는 무역 회사도 나날이 성장해 나갔다. 어느 날 매출 전표를 처리하던 중에 아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