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부턴 무한 반복이었다. 미팅 끝나고 마무리할 때,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외근을 오가는 택시에서 한주와 나는 서로 다른 생각을 내세우며 부딪혔다. “그 행복이란 말 좀 그만해라. 어찌 됐건 KPI를 달성해야지. 그게 마케터의 기본자세라고” “하지만 목표 달성은 고객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넌 인마,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래. 회사에서는 마케팅을 돈 쓰는 집단으로 보거든? 영업이나 재무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어요. 마케팅이 빈틈 보일 때만 기다린다고” “빈틈을 보면 어떻게 하는데요?” 휘유, 난 짧은 한숨을 쉬고 나서 어린 학동을 타이르는 서당 훈장님의 표정으로 말했다. “마케팅 예산 깎이고, 그래서 성과 못 내고, 또 그게 반복되는 악몽 같은 뫼비우스의 띠가 이어지는 거야” “전 모르겠어요. ..
저 자식은 없기를 바랐는데. 조금 늦게 도착한 족발집에 조영욱이 있었다. 몇 안 남은 회사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이니 녀석이 빠질 리 없지만, 오늘은 또 무슨 꼬투리로 이죽거릴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술맛이 떨어졌다. “이야. 역시 유영빈이야. 현장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최우수 매장 포상도 받고” “야, 그냥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넌 영빈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칭찬하는 건데? 너, 옛날처럼 볼드모트로 변한 건 아니지? 주변 사람들 쥐어짜서 성과 만드는 게 네 특기잖아?” 이 자식이. 한 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인사팀 정지호가 “야야. 오랜만에 만나서 왜들 그래. 한잔하자”라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영빈이 이제 변한 거 알잖아. 방배점 분위기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쥐어짜..
혜은이 앞에 있다는 사실을 한나는 아직 머릿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절 공원의 풍경과, 함께 앉았던 벤치와, 귓가로 들리던 새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어머, 얘 좀 봐. 벌써 나 잊어버린 거야?” 그 사이에 언니 목소리가 더 커진 것 같네. 이제서야 혜은을 실감한 한나는 그녀의 미소를 따라 빙긋 웃어버렸다. “잠깐 괜찮아? 근처에 일 있어서 왔다가 한나 보러 온 건데” “그럼요. 과장님 좋아하는 허니 레몬티로 드릴까요?” “아직 기억해 줘서 고맙네. 응, 그걸로 부탁할게” 혜은이 메고 있던 백팩에서 카드를 꺼내려 하자 한나가 만류했다. “저 보러 왔다면서 무슨 계산이에요. 2층 좌석에 올라가 계세요. 바로 가지고 갈게요” 카운터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직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
카페 토라세 방배점의 유영빈 점장은 요즘 강한나 매니저의 냉랭함에 오한이 들 정도다. 평소에도 나긋나긋한 편은 아니었지만, 회식 이후 쌀쌀맞음이 유독 심해졌다. 회식에서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영빈이 몇 번을 곱씹어 봐도 그럴만한 일을 기억할 수 없었다. ‘내가 미쳤지’ 유영빈 점장을 마주칠 때마다 한나는 그날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무슨 생각으로 안경을 벗었을까. 단톡방에 올라온 회식 사진을 보고 가물가물했던 장면들이 또렷이 떠올랐다.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 모양을 했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택시 타기 전 점장에게 윙크를 했던 것까지. 영빈은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지만 한나..
30분 만에 둘이서 소주 세 병이면 페이스가 너무 빨랐다. 한나는 꺾어 마시는 법이 없었다. 점장과 매니저가 앉은 자리 옆에 누가 오겠는가. 우리 주변은 휑하니 빈 채였다. “알아요. 안다고. 나 재수 없는 거” 방금 비운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한나가 피식 웃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저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 계집애는 뭐가 잘났다고 맨날 이렇게 틱틱 거리나” “대리 때 내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요?” 술 병을 건네받은 한나가 이번에는 내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볼드모트였어요. 악의 화신. 내 생각과 다르면 끝까지 싸움 걸고, 세상 자기가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하는” “크하하. 지금은 무슨 간달프처럼 굴면서. 거짓말 같은데” “다 그렇게 크는 거야. 강 대..
200만 원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잘 못 생각한 걸까. 이 집의 한우 등심은 우리가 싹쓸이할 기세였다. 주간, 야간 모두 해서 카페 토라세 방배점 구성원 16명이 모두 모인 첫 회식이다. 어린 친구들이라 그런지 먹성도, 서로 쉽게 친해지는 것도, 과연 젊은 게 좋구나 싶은 모습이었다. “아니, Z세대 친구들은 소맥을 반반씩 타나? 이거 맥주잔이 소주처럼 투명한데?” “네에, 이건 점장님 스페셜로 제조했습니다! 마셔라, 마셔라!” 남자 직원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매번 이 모양이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 회식이면 이런 식으로 술로 상사를 골탕 먹인 곧잘 있었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마시고 죽지 뭐! 건배!” 내가 내민 맥주 글라스에 같이 부딪혀 오는 잔 중에 검은색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잔을 비우고..
“아, 그리고 한 번 기다려 봐. 이런 분위기면 우수 점포로 대표 명의 포상 받을 수도 있을걸?” 팀장은 역시 마케터 출신이 하는 매장이라 다르다며 격려해 준 후 통화를 마쳤다. 어안이 벙벙한 채 앉아있던 내게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쳤다. “우리 매장 이름으로 검색하면 포스트, 몇 개 정도 나와요?” “음… 못해도 300개는 넘겠는데요” 민주도 어느새 자기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을 열어 손가락을 움직이며 답했다. 한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챘는지 입술을 잘근대며 씹고 있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어쩌면 우리 매장이 대표님 포상 받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강 매니저님. 포상 받는 직원은 어떻게 되는지 알죠?” “네. 경우에 따라서는 특진도 되고, 최소한 진급에 가산점이 붙습니다” 한나는 단어 하..
민주는 내가 제시한 조건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고 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맑게 웃는 민주를 보는 한나가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 민주 씨. 그런데 쉽지 않을 거예요. 너무 과한 과제를 준 게 아닌가 난 미안한데…” 강 매니저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만만한 조건을 내걸 순 없었지만, 일주일 뒤면 민주를 데리고 장난친 것 같은 모양새가 될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 내가 상황을 말해 줄게요. 고객 의견 접수는 매장 당 많아야 한 달에 열 건을 넘지 않아요. 게다가 거의 불만 접수고요. 칭찬? 한 달에 하나 들어오면 그 매장은 기록 세운 거지. 이제 그렇게 헤헤 거리고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 이해가 돼요?” “네 겁나요. 그래도 점장님이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맡기셨다고 생각하지 않을래..
생존의 조건(상) 이곳에 발령받은 지 삼 개월째지만 내 앞의 이 여자는 여전히 무섭다. 강한나 매니저와 매장 사무실 테이블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일단 외모가 평소와 달랐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평소 길게 늘어뜨리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대충 묶은 채, 늘 쓰고 다니는 검은 뿔테안경의 오른쪽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다. 뭔가 심기가 불편할 때 하는 버릇임을 난 알고 있다. “점장님, 매니저로서 건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강한나 대리님, 말씀하세요” 내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찌그러졌다. “매장에서는 직급이 아닌 직책으로 불러달라고 여러 번 말씀드린 걸로 아는데요. 아니면, 앞으로는 저도 점장님이 아니라 유영빈 과장님,이라고 해 드릴까요?” “앗. 미안해요. 아직 본사에서 했던 버릇이 ..
점장 발령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르바이트 채용이었다. 2개 층 50석인 카페 규모에 비해 인원이 모자랐다. 월 매출 대비 인건비를 따져 봤을 때 2명 정도 비용 여유는 있었다. “유영빈 과장, 2년 정도 현장 다녀와야겠어” 과장 진급 후 직영 카페 점장으로 나가는 것이 회사의 운영 방침이니 예상은 하고 있었다. “현장 경험 가지고 본사 복귀하면 마케팅 시야도 넓어질 거야. 가서 머리도 좀 식히고” 부문장은 환경 좋은 매장으로 나를 배치시키느라 힘 좀 썼다며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카페 토라세 방배점. 반년 전에 오픈한 직영점으로, 매출은 나쁘지 않으나 상권을 생각하면 더 잘 할 여지가 분명히 있는 매장이다. 케이크로 객단가를 높이려는 생각으로 한 명의 아르바이트는 우선 제빵 자격증을 가진 남자로 채..